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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촛불, 대선 그리고 우리의 미래


1.


도서관에서 보수지를 샅샅이 훑고 있는 70대 노인을 본다. 


그는 전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고, 개발독재시대에 궁핍한 청춘을 헌신하며 대한민국의 성장가도를 닦있던,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다. 그들이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고, 그 난폭했던 시대를 추억하는 건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그 아버지가 우리를 낳았고, 4, 50대 중늙은 아들들은 아버지 세대가 일군 부실한 성장의 과실을 소비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2.


전쟁 세대의 손자, 다음 세대를 막 구성하고 있는 어린 청춘들은 아버지로부터 다시 물려 받은, 그 척박한 땅에서 단물이 모두 빠진 껌을 힘겹게 씹고 있다.


이들에게 남겨진 유산은 더이상 과실을 잉태하지 않는 척박한 땅과, 이전 세대들의 순진한 헌신에 기생해 온 강고하고도 부정한 기득권이다.





3. 


변화는 필요하지만, 어쩌면 내가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 도래할 필연일 수도 있다. 새로운 세대가 도무지 용납할 수 있는 터전이 아닐 뿐더러, 상속조차 불가능한 부끄러운 부채를 견뎌내는 건 힘든 일이니까.


하지만 당장이라도, 그 민낯이 적나나하게 드러난 부정한 기득권이 나와 내 아이들의 미래를 불공평하게 지배하는 건 더이상 용납하기 힘들다. 이것이 바로 ‘촛불의 정신’ 아니었을까?






4.


더러운 기득권에 맞서 일어선 그 촛불의 정신은 이미 퇴색했는가?


‘변화’보다는 ‘화합’을 넌즈시 소구하는 한 유력한 후보에 의해 표심이 흔들리고 있다. 과연 화합과 변화는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일까? 혼란없는 변화란 가능키나 한 것일까?


변화는 혼란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그 변화와 혼란을 통해서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후보들이 입에 올리는 아름다운 단어, ‘화합’이니 ‘대연정’은 ‘기득권과의 영합’과 다름아니다. 선거철이면 주로 위기에 처한 기득 세력이 입에 올릴 수 밖에 없는 사탕발림.... 이는 촛불이 진정 원했던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5.


난 민주당 경선에서 이재명을 지지했었다. 혼란이 파생되더라도 내가 원하는 변화를 말하고 있었으니까.


나 역시 기득권을 누렸을 세대의 일원이지만 변화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내가 향유해 온 그 알량한 기득권조차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