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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이야기

호텔 룸서비스의 미래

1.

 

쇼파 위의 나른한 주말 오후

단잠을 방해하며 동네 골목 곳곳을 요란스럽게 헤집고 다니는 그 물건,

소시민의 게으른 허기를 간단히 달래는 그것.


철가방


인천 차이나타운의 짜장면 박물관에 가면 철가방의 원형을 구경할 수 있다. 해방 직후에 만들어졌다는데 당연히 '철'이 아니라 나무로 된 틀이다. 당시엔 한껏 사치스러워 보였을 그 나무 가방으로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은 이들은 고관대작 쯤이나 되었을까?



이미지: 주간조선/짜장면 130년



아실랑가 모르겠지만 호텔에도 철가방이란 게 있다. 고상한 호텔의 외관에 혹여 상처라도 낼까 노심초사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모양새는 의외로 비슷하다. 음식을 나른다는 그 본연의 용도를 고려하면 다르지 않아야 오히려 당연하다. 바삐 오가는 그 길이 주택가 뒷골목의 흙길이냐 아니면 럭셔리 호텔의 꽃카펫이냐의 차이일 뿐.



강남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룸서비스용 철가방

(호텔 카푸치노)



핫박스 Hot Box


맨 아랫 칸에는 음식을 보온하기 위해 전열구를 쓰거나 고체 알콜을 둔다. 윗칸에 음식을 넣고 트롤리를 이용해 주방과 객실을 오간다. 호텔에서야 고상한 외래어가 붙여졌지만 어차피 철로 만든 음식 가방, 즉 '철가방'이다.

호텔의 철가방, 핫박스와 트롤리



2.



블랙 턱시도의 버틀러가 순백색 린넨에 덮힌 '철가방' 트롤리를 밀며 객실로 들어오면 이내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얀색 장갑이 실버돔을 열면 기다리던 요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왕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5 달러를 거만하게 내민다. 그리고 찰라의 카타르시스....


다소 비싼 가격이지만 일년에 한 두 번, 나는 소중한 나를 위해 이 정도 사치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럭셔리 호텔 서비스의 상징, 이름하여 룸서비스, 혹은 인룸다이닝 In-Room Dining.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의 다음 방문에서는 이 고상한 서비스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로망


센세이셔널 했던 그 컨셉은 1930년대 미국에서 잉태된다. 힐튼에 먹혔다 최근 중국의 보험사 앙방으로 팔려나간 뉴욕의 윌도프 아스토리아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당시 갖가지 고상한 음식을 객실 안으로 시켜 먹을 수 있다는 개념은 아마도 사치의 최고봉쯤 되었을까? 


정해진 종말을 더욱 앞당긴 장본인은 웨스틴 체인이다. 1967년, 24시간 하루 왠종일 가능한 룸서비스 시대를 열었는데, 원할 경우 새벽 3, 4시에도 산해진미를 주문해 먹을 수 있었다.




3.


따지고 보면 이건 미친 짓이에요. 

오지도 않을 고객의 전화를 기다리며 오더 테이커가 밤을 지세워 대기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더군다나 음식을 만들 쉐프도, 그리고 이를 배달해야 할 서버도 그 전화 한 통에 목을 메달고 함께 밤을 세워야 해요. 그래 봐야 전화가 울리는 경우는 기껏 한 두번에 불과합니다.

이건 말도 안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이런 '자뻑' 서비스가 지금까지 살아 남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위 애절한 스토리는 어디에선가 본 외국 호텔리어의 절규[각주:1]를 다소 자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이익은 고사하고, 대부분의 대형 5성 호텔들 중 룸서비스에서 나오는 매출[각주:2]이 서버와 쉐프의 인건비를 커버하고 남는 곳이 있다면 최근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뜨거운 장에 내 손을 지질 일'이다.


요즘 같이 각박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당장 돈되지 않는 대고색 서비스를 하염없이 유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주가치 극대화, 다시 말해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는 기업들이 돈먹는 하마, 룸서비스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는 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


더군다나, 지금의 룸서비스는 더 이상 옛날의 그 '고퀄'이 아니다. 철가방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 식은 채 배달되기 일쑤이며, 잠결에 간신히 만든 그 스파게티에서 어떤 맛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옛날의 품격도, 그리고 호텔리어의 정성도 더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바야흐로 세상은 바뀌었고, 그 옛날 호텔의 룸서비스를 고귀한 경험으로 여겼던 꼰대 세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다. 실속 중심, 자유분방한 밀레니얼이 득세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값만 비싸고 맛없는 룸서비스가 가당키나 한 옵션인가? 


더군다나 호텔 밖을 한발짝만 나서면 이름난 로드샾이 수두룩하다. 낯선 여행지라도 걱정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손가락질 몇 번이면 리뷰까지 찾아 볼 수 있는 세상이니까. 어쩌다 끼니를 놓치면 아쉬운대로 24시간 편의점에서 요기하면 그만일 일이다.


이미지: Bloomberg/Say Goodbye to Your Hotel’s Overpriced Room-Service Menu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는 호텔리어를 위축시킨다. 코스트 절감을 위해 '코묻은' 돈까지 사정권에 넣게 되면 곧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들고, 급기야 그 아름다웠던 고객의 추억과 로망도 결국 상처받고 만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며 호텔들이 이 연중무휴, 24시간 철가방 서비스를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미련


미련 때문이겠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에 대한 고객의 로망, 그리고 이를 매정하게 외면하지 못하는 호텔의 미련. 어쩌면 '특급'으로써의 어줍찮은 체면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경쟁 호텔의 하는 냥을 하염없이 눈치보는 그 소심한 혹은 보수적인 산업 성격 탓이거나.


시장엔 호텔이 넘쳐난다. 비슷한 가격에,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외관과 정체성. 룸서비스라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 '얻어 걸리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2007년 금융 위기를 넘으며 출장 버젯이 하염없이 줄어들고 말았지만 호텔 룸서비스를 로망으로 여기는 여행자들은 아직도 적지 않다.


더군다나, 시장에서는 '보이는 손'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별 4개, 4성 등급 정도 달 요량이면 여하한 형태이든 이 철가방 서비스를 유지해야 하니까.





5.


손해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오래 전에 넘어섰고,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호텔 객실에서 허기를 달래야 할 피치 못할 경우, 혹은 폐쇄된 객실에서 뭔가를 먹고 싶어하는 인간 욕구는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까.


STR의 통계[각주:3]에 따르면 미국의 5만여 개 호텔들 중 여하한 형태의 룸서비스를 유지하고 있는 호텔은 반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사업차 출장 온 고객들의 40% 정도가 룸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이 곧 호텔의 룸서비스를 여태 먹여 살리고 있는 페이트런이다.


적응


호텔이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건 사실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실속을 지상 최대의 명제로 생각하는 소위 중저가 비즈니스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시켜 먹는다는 건 이미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들 호텔은 돈먹는 하마를 키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등급은 포기해도 크게 상관없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전락하고 있으니까그나마 체면을 중시하는 럭셔리 스케일과 5성급 호텔들이 절충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너나없이 눈치만 보고 있던 차에 미국의 한 대형 호텔이 리스키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며 변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2013년 55명의 직원을 잘라내며 운영하던 룸서비스를 없애버리고 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인벤토리 2,000개의 자이언트, 뉴욕 힐튼 New York Hilton Midtown 이다.


이미지: The Wall Street Journal/Hotel Dining Goes Self-Serve



이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업계에서 회자되어 왔는데, 여러 면에서 간단치 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고전적인 형태의 룸서비스를 없앤 건 맞지만 그 본연의 기능은 올데이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이관했다. 하지만 기존의 서비스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 연중무휴, 24 시간 서비스 포기 - 배달 시간을 오전과 저녁 일부 시간으로 제한

  • 고품격 서비스는 no more - 트롤리를 이용하지 않고 시중의 프랜차이즈들이나 사용하는 종이백에 넣어 객실로 배달

  • 단촐하고 케쥬얼한 메뉴 - 샌드위치나 햄버거 등 이런 delivery 방식에 적합한 메뉴만 존치





6.

여하튼, 이러한 변화[각주:4]를 통해 호텔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하다. 서비스의 본질은 유지하되 옛날과 같은 말도 되지 않는 인건비 덤탱이는 더이상 감수하지 않겠다는 것.

변화

이러한 경향은 민첩한 덩치의 호텔들 사이에서 파생형 서비스들을 양산해 왔다. 대세는 고급진 본고장 말로 'Grab N Go'인데,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테이크아웃 take-out 혹은 'to go'와 다르지 않다. 올데이다이닝 레스토랑이나 델리에 샌드위치나 음료 등 간단한 메뉴를 마련해 두면 고객이 구입해 직접 객실로 픽업해 먹거나 밖으로 들고 나간다.

음식의 본질이란 먹고 싶을 때 '맛있게 먹는 것'. '딜리버리, 즉 배달'이란 행위는 어찌보면 본질을 포장하는 부차적인 서비스에 불과한 것이다. 여하한 사정으로 그 부차적인 서비스는 포기하되 본질에 충실하며 경쟁력있는 가격으로 고객에게 어필하겠다는 호텔의 시도는 시장으로부터 배척되어야 할 일이 아니다.


밀레니엄서울힐튼 델리 Grab N Go


최근엔 키오스크 Kiosk와 결합하며 무인판매 형식 (쉽게 말하면 자판기화)[각주:5]까지 띄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주방에서 조리한 햄버그나 샌드위치, 샐러드 그리고 요거트나 신선한 쥬스 등을 자판기에 넣어 판매한다. 메뉴는 다소 제한적이지만 서비스의 본질을 유지하는 대신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


7.

그러나 이코노미와 미드 스케일에 걸친, 레스토랑을 소유하지 않은 중소형 외국 호텔들 위주로 시도되고 있는 변화는 더더욱 파격적이다.

저녁 9시. 격무에 시달렸던 난 지친 몸을 이끌고 객실로 돌아온다. 긴장이 풀리자 미처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날카롭다. 하지만 다운타운 레스토랑의 마지막 오더를 쫓아 호텔을 나서기엔 너무 피곤하다.

스마트폰으로 호텔의 앱을 열고 'Food' 옵션을 누른다. 호텔과 연계된 배달앱으로 바로 연결되고 인근의 유명 레스토랑들이 화면을 채운다. 마음에 뒀던 메뉴를 검색하자 가격, 메뉴에 대한 설명, 기타 옵션 그리고 배달 예상시간 등의 정보가 나타난다. 난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지불 방법으로 '호텔 계정'을 선택한다. 

Deliveroo/런던 베이스의 스타트업으로 한국판 배달통


20분 후 배달맨은 내가 주문한 음식을 호텔의 컨시어지 데스크에 놓고 간다. 컨시어지는 이를 트레이에 담고 커틀리와 글래스 등을 따로 챙겨 내 방으로 옮긴다. 아마도 추가 요금이 청구되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일부 인용: Room Service Is Dead; Long Live Room Service

그 원형은 미국의 소형 호텔들 사이에서 제법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아웃소싱 서비스이다. 안전 문제로 객실로의 배달은 호텔 벨맨이나 컨시어지에서 수행하지만, 외부 업체가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레스토랑들과 배달업체를 코디하며 주문한 음식이 호텔까지 배달되도록 서비스한다. 


위에 인용한 예는 아웃소싱 업체 대신 모바일앱이라는 하이테크를 등에 업었을 뿐이며 고객이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옵션을 직접 선택하는 형식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도 다소 원시적이지만 비슷한 형태의 서비스를 채용한 곳이 있다. 강남 글래드 라이브 호텔은 푸드플라이 Foodfly와의 협력을 통해 투숙객이 유명 레스토랑의 음식을 주문하면 컨시어지에서 이를 받아 객실로 전달한다. 


STR의 2015년 리포트에 따르면, 새로 지어지거나 계획 중인 호텔 프로젝트 중 무려 85%가 레스토랑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사그라들지 않는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배달 서비스가 레스토랑의 빈자리를 빠르게 파고들고 있는데, 이들 배달 서비스를 통한 호텔로부터의 주문이 2011년 부터 2014년 중반 사이 무려 125%의 성장세를 기록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8.


로망으로 섬겨왔던 그 격조 높은 호텔의 서비스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인가? 하지만 이는 어쩌면 희생을 최소화하며 고객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호텔의 자구책이다. 


이에 반해 국내 호텔들의 반응은 역시나 늦다. 대부분의 5성 급 어퍼업스케일 호텔들은 계속 울며 겨자를 먹고 있는 중인데, 새로운 경향을 수용하기엔 아마도 너무 소극적인 것일까? 아니면 파생될 구조조정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시간의 문제일 뿐 일개 호텔이 훼방할 수 있는 추세가 아니다.  경계는 허물어졌고 실속이 지고지순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중 편의점이 5성 호텔의 그 완고한 자존심을 허물며 퍼블릭으로 침투해오고 있는 세상이다. 호텔 룸서비스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질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등급체계 역시 유연하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럭셔리 스케일에서는 이 룸서비스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아질 수 있다. 럭셔리의 경쟁력, 어중간한 포지션의 일반 호텔 그리고 에어비앤비가 중계하는 대안 숙박시설과의 차별화 요소가 바로 그 한때의 로망, 호텔 본연의 '사람' 서비스가 아닐까?



어쨋거나 혹여 독자 제위께 호텔을 이용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룸서비스는 반드시 이용하고 볼 일이다. 조만간 대부분의 호텔에서 사라져 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니까....



*이 포스트는 호텔아비아 2017년 3월 호에 기고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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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글

Why Hotels Are Cutting Back on Food Services

Say Goodbye to Your Hotel’s Overpriced Room-Service Menu


  1. 다소 과장했는데, 룸서비스를 위해 order taker를 따로 유지하는 호텔은 더이상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룸서비스에 오더테이커를 따로 배정했었다. [본문으로]
  2. 한 조사 기관의 좀 오래된 통계에 따르면, 미국 호텔들 중 룸서비스가 호텔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이마저도 급격히 줄고 있는 추세였다고 한다. 2007년 객실당 년 룸서비스 매출은 1,150 달러였는데 2013년에는 866달러, 즉 객실당 하루 2.37달러의 매출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PKF Hospitality Research) [본문으로]
  3. 출저: Why Is Hotel Room Service So Expensive? https://priceonomics.com/why-is-hotel-room-service-so-expensive/ [본문으로]
  4. 룸서비스를 보완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꾸준히 시도되어 왔다. 수비드 방식을 활용해 낮에 준비해 둔 음식을 간단히 데워 컨시어지 스텝이 딜리버리하는 방법도 본 적이 있다. [본문으로]
  5.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음료나 스낵 등 공장 제품을 판매하는 자판기는 이미 오래 전에 이비스 등과 같은 mid-scale에 도입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