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호텔, 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텔
늙은 몽돌은 잘 모릅니다. 20년 호텔리어 경력도 더러 소용없더군요. 주관이라도, 특정 호텔을 입에 올릴 자격을 부족하지 않게 갖추려면 아마도 수많은 호텔들을 두루 섭렵해야 하나봐요.
그렇지만 호텔업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호텔을 자주 이용하는 몇 분이 거명 하는 걸 들은 적은 있습니다. 더러는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1001 곳 휴양지 중 하나로 꼽기도 하더군요.
제주 포도호텔,,,,
포도모양 맞습니다. 제주의 '오름'을 의미한다고도 하더군요. 전통적인 제주 민가 모습을 담았다는데, 강한 바람에 대비해 그물망처럼 촘촘히 얹은 지붕 줄매기의 형상도 뚜렸합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를 자랑하는 럭셔리 도심 호텔도 아니요, 황혼의 해변에 자리 잡은 리조트 호텔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호텔,
지인 몇 분이 서슴없이 꼽는 제주의 호텔,
20년 호텔리어인 제게도 생소했던 그 이름.....
핀크스 포도호텔
Pinx Podo Hotel
제주 포도호텔
겨우 26개의 객실,
레스토랑이라 부를 만한 곳도 달랑 하나...
번거러운 이름도 필요하지 않았던 모양이죠? 그저 포도호텔 레스토랑이랍니다.
제주 포도호텔
덩치로 따지면 휴양지의 조그마한 펜션 또는 게스트하우스에 불과한 이 곳.
도대체 무엇으로 제주 촌구석의 이 조그마한 호텔을 우리나라 최고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을까?
예술작품
'틀어 박히다, 숨어 있다, 열다, 닫다, 혼재하다'
공간들이 호텔을 규정합니다. 바깥의 텃밭도, 그 텃밭의 돌, 그리고 호텔 내부의 닫히고 열린 공간도. 호텔은 드러나지 않고, 주변의 풀과 나무와 돌, 그리고 바람과도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죠.
포도호텔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랄까요?!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디자인했고,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했다고 합니다만 그 위상이 어떠한지 무지랭이 늙은몽돌은 들은 바 없습니다.
핀크스 포도호텔은 2001년 태어났습니다. 원 소유주는 제일교포 2세인 김홍주 회장이었습니다만 2010년 SK네트워크가 인수했다죠? 그러니 그랜드워커힐과는 자매호텔 격입니다.
포도호텔의 중정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산방산과 바다
앞마당은 개방된 공간, 막힘없는 시야로 산방산과 바다, 그리고 빛내림을 한껏 포용합니다. 하지만 맞은 편 호텔의 입구에 서면, 마치 미로의 초입인 듯 긴 복도만 보일 뿐이죠.
제주 포도호텔
좁고, 어둡고 그리고 한없이 길기만 해 보입니다.
제주 포도호텔
빛의 케스케이드
비로소 마딱트리는 넓은 공간, 케스케이드 Cascade..
빛이 폭포되어 떨어지는데, 구원의 공간인 듯 마침내 가슴이 트입니다.
제주 포도호텔
어둡지 않으나 밝지 않습니다.
천정엔 형편없이 작은 전구가 부족하게 박혔고,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자연광만이 눈부시게 공간을 밝힙니다.
제주 포도호텔
카펫도 아니요, 천연목 마감도 아닙니다. 블랙톤 슬레이트 민트석으로 된 딱딱한 돌바닥이 꽤 불편한데, 어둠 한 켠에 나무의자가 덩그러니 놀리듯 놓여 있군요. 저건 다시 봐도 앉으라 놔 둔 게 아닌데, 아마도 작품일테죠?
제주 포도호텔
예술이란, 고상하지만 본디 편치 않습니다.
만지고 싶어도 손 댈 수 없고, 불편해도 쉴 수 없는,
딱딱한 곳에 자리 잡은 고상한 그것
디자이너 이타미 준이 이 좁고 어둡고 딱딱해 불편한 복도로 무엇을 의도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객실로 바삐 숨어 들어 안식하고만 싶어집니다.
제주 포도호텔
객실의 입구는, 표식이 따로 없다면 찾기 쉽지 않을 정도로 잘 숨겼군요.
제주 포도호텔 딜럭스타입 객실
강탈하다시피 봤더랬습니다.
겨우 26실, 주말이라 당연히 풀하우스였는데, 아직 체크인되지 않은 방 하나를 간신히 졸라 구경할 수 있었거든요.
제주 포도호텔
매우 넓고 여유롭습니다.
18평이니 서울의 특 1급 호텔에도 비할 바가 아니요, 최근 들어서는 중저가 비즈니스 호텔의 7평 짜리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이 다른 공간입니다.
가구는 다소 무겁고, 군데 군데 상처도 났지만 우아함을 잃진 않았더군요.
제주 포도호텔
객실 내부에서 내다 보는 열린 공간의 모습도 좋지만 밖의 테라스에 앉으면 더 넓은 자연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습니다. 나무 원목을 댄 천정의 모양새가 독특하군요.
딜럭스형이 한실과 양실을 합해 20개. 객실이 2개인 40평 짜리 로열실이 5개, 그리고 60평 짜리 스위트룸 1개,, 한실은 온돌바닥, 양실은 카핏이 깔렸지만 침대와 메트리스는 동일합니다. 듣자니 일본 시몬스의 것을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제주 포도호텔
미니바는 평범합니다. 네스프레소, 캡슐커피 머신이 없는 걸 보면 유행을 민감하게 추종하진 않는 듯 하군요. 26실이니 큰 비용이 소요되진 않을 터, 유행이 정착해 일반화되면 갖추려나요?
제주 포도호텔
우리나라 유일의 온천
욕실도 아주 넉넉해 여성 고객분들의 만족도가 높겠더군요. 욕조와 샤워부스를 따로 설치했는데 이만한 크기의 객실이라면 응당 그래야 합니다.
온천수가 나옵니다. 제주에서 처음 발견된 온천이라며 자랑이 대단하시더군요. 2,000m 아래의 것을 끌어 올린다는데 오만년? 전 육지의 표면을 적신 물이라던가요? 아라고나이트 고高 온천이라 이름하더군요. 모든 객실의 수도꼭지에서 우유빛 뽀얀 온천수가 나오지만 편백나무 욕조는 한실에만 설치되어 있습니다.
객실 외에서도, 예를 들어 노천에서도 이 온천수을 즐길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만 호텔의 구색은 의외로 단촐합니다. 와중에 욕조에 놓인 록시땅이 앙증맞더군요.
제주 포도호텔
구경하는 내내 안타까웠습니다. 이렇게 수박 겉 핥 듯 둘러봐서야 그 진가를 말할 순 없으니까요. 투숙하고, 적어도 이틀 정도 머물러야 비로소 그 가치를 겉으로나마 간신히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용한 이들 사이에선 호평일색, 그렇지만 객실가동율이 높지는 않다더군요. 육지의 젊은 잠재 고객들에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객실 가격 또한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딜럭스 타입의 정가 Rack Rate이 44만원. 호텔로 직접 연락해 예약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듯 합니다. OTA를 통하면 보다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요. 아마도 성수기와 비수기간 가격차가 아주 클 듯 보이고, 프로모션도 간간히 있는 모양이더군요.
제주 포도호텔
제주 입지의 호텔, 타깃고객은 육지에 있으니 더 많은 타깃에 도달할 수 있는 마케팅 채널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26실 채우자고 600실 호텔이 채용하는 수단을 고려할 순 없겠죠. SK네트워크의 판매 채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는 것도 괜찮을 듯 보였습니다만 당연히 시도했겠지요?!
부족한 부대시설이 과제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놀만한 공간도 없고, 수영장도 없으며 그 흔한 피트니스도 없습니다. 한걸음 밖을 나서면 산이고, 바다며 해수욕장이니 보고 즐길 거리가 바깥 지천에 널렸는데 호텔 내부에 이를 수용해야 할 필요도 없어 보이더군요. 그저 자연 속에서 그것들과 함께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한 것이죠.
가운데 노천 온천이 하나 있었다면 이런 불평도 적잖이 누그러질 듯 했습니다.
제주 포도호텔 레스토랑/식사하러 들리는 고객들이 많습니다.
북적이는 레스토랑이 오히려 거슬리는 면도 없잖습니다. 아마도 하나 제대로 있는 식음료 매출을 포기하긴 쉽지 않았겠죠. 하지만 동전의 양면,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더군요.
자연에 파묻힌 작은 호텔, 그 속의 한적함을 애정하는 페이트런들에게 저 많은 트래픽은 오히려 상품가치를 상처내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마저도 당분간 감사해야 합니다. 일단 호텔을 알려야 하니까요. 저 역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포도호텔 왕새우 튀김우동을 간신히 먹긴 했습니다. 따로 포스팅하고요.
제주 포도호텔 중정
매정한 일상으로부터 피난한 값비싼 쉘터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편안합니다.
26실, 마치 거칠고 매정한 일상으로부터 피난한 공간, 비로소 쉴 수 있는 쉘터라고 할까요?! 이 피난조차도 감당할 경제적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허용된다는게 못내 아쉽긴 하지만.
제게 이 호텔을 추천했던 지인 분의 댓글을 위로 옮깁니다.
일본에서 한국인 건축가로, 정작 그리운 고국에 돌아와선 일본 건축가로 치부받았던 이타미준의 삶은 우리 땅이면서도 수탈의 대상, 유배의 장소로 등장하던 제주의 역사와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십년을 입어도 일년 된 듯한 옷. 일년을 입어도 십년 된 듯 한 옷
핑크스 같은 호텔을 볼 때마다 한 번을 듣고도 머리속에서 무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광고 카피 한토막이 떠오릅니다. 유행을 애써 쫓아가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곳. 도심의 매머드급 호텔이 하루와 하루 사이의 쉼표라면, 이런 작은 럭셔리 호텔은 투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과 삶 사이에 존재하는 말줄임표가 되는 것이겠지요.
요즘들어 40객실 언저리의 럭셔리 호텔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 삶의 궤적이 내 고객들과 비슷한 지점에서 교차할 때, 나도 저기에서 편안한 하루를 보내며 삶을 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작은 물음을 가슴에 담아갑니다.
다시 한번 배려해 주신 오충모 파트장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투박하고 부족하지만 제가 가진 것을 그냥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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