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동안 이 책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나 고민해야 했습니다.
익숙치 않거든요. 호텔에 관한 것이지만 여태 봐 왔던 서적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아주 궁금해 했던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을 여행서로 소개하고 있지만 아마도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마케팅 의도가 개입되었겠지요?! 제 눈에 이 책을 읽어야 할 독자는 여행자들이 아니라 딱 호텔리어입니다.
여행의 공간, 어느 건축가의 은밀한 기록
서점에 흔히 깔린 여행 서적 중의 하나가 아니라 호텔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여행기이고요, 호텔의 객실 그리고 그것이 숨기고 있는 인간학과 휴먼스케일을 다뤘습니다.
지은이 우라 가즈야는 전세계 호텔들을 돌며 객실 구석구석을 줄자로 측량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편지지에 스케치로 담아 냅니다. 얼개는 다소 획일적인데, 소개하는 호텔마다 2, 3 페이지 정도를 할애 해 한 페이지에는 이 스케치를 담고 나머지 한 두 페이지는 디자인 배경 그리고 객실과 가구 등의 기능적 특성을 간단히 언급합니다.
평소 이런 분야에 관심 많았던 제게는 끝까지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겐 책의 중/후반부 부터 다소 지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호텔과 그 호텔의 배경만 바뀌어 가면서 동일한 플롯이 계속 반복됩니다.
디자인 한 분야에만 충실한 내용이므로 어쩌면 단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점으로 인해 신뢰가 더해지는 측면도 없지 않겠군요.
여행 저널리스트 테라다 나오꼬는 '호텔 브랜드 이야기'로 호텔의 서비스와 철학을 논했지만 여행가의 자격으로 다루기엔 다소 버거운 내용이었죠. 일반인에게나 소용될, 얕은 수준의 호텔 교양서 용도에나 적합하다랄까요? 호텔리어의 눈으로 읽으면 아무래도 미심쩍고 집중력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관련글: 세계 최고 호텔들의 성공비결, 호텔 브랜드 이야기
실내 디자인을 전공한 박진배 교수님의 '호텔경영과 디자인 팔레트'가 그나마 비슷한 분야를 다루었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호텔경영에 접목된 디자인 이론을 다루므로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만 호텔의 경영을 논하는 부분은 다소 위태로워 보일 수도 있어요.
관련글: 호텔경영과 디자인팔레트
그런 면에서 오늘 소개해 드리는 이 '여행의 공간'은 적잖이 안심됩니다. 오로지 건축가로써의 본문에만 충실하거든요. 어줍잖을 수 밖에 없는 다른 관련 분야를 애매하게 넘나들지 않고 호텔 객실의 설계와 디자인 부분만 완고하게 논합니다. 그렇지만 호텔 경영과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에요. 이들은 결국 호텔의 서비스에 오롯이 투영되니까요.
제겐 새롭고 흥미진진한 내용들이지만 욕심을 많이 부려 이 책을 접하면 곤란하고요. 객실의 설비나 그것들의 배치와 기능, 그리고 디자인적인 의미와 매커니즘을 눈동냥하는 정도라면 꽤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군데군데 삽지 형식으로 색을 달리 해 몇장씩 섞어 넣은 부분의 내용이 오히려 맛깔스럽군요. 호텔 디자인에 대한 지은이의 가치관이 녹아나 있고요, 책의 대부분을 구성한 스케치들에 대한 철학적 배경이 때때로 드러납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최신의 트랜드가 반영되지 않은, 다소 오래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스케치들을 자세히 보면 종종 1980년대 후반의 것들도 섞여 있더군요. 책에 소개된 호텔들 중 일부는 브래드가 바뀐 사례도 눈에 띄는데 적절히 수정 반영된 것도 있고 미쳐 손보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번역서의 초판이 2012년 발간되었지만 원래는 꽤 해묵은 것이었더군요. TOTO통신이라는 TOTO주식회사의 사보에 1994년 부터 실렸던 '게스트룸 여행'이라는 연재물을 묶어 2001년에 처음 일본에서 간행되었고, 2004년에 일부 추가해 다시 출판된 서적입니다.
일본에서 출간되고 십수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우리나라로 건너온 셈인데, 일본에 비해 적어도 15년 ~ 20년 뒤처진 우리네 수준을 드러내는 또다른 방증이라 친다면 무리일까요? 그나마도 많이 따라 잡았다는 상태의 것이 이 지경이군요...
아울러, 본문에서는 어쩔수 없이 일본 호텔의 태동기에 대한 기술 등 일본 호텔 산업에 관한 부분이 더러 눈에 띄는데, 제겐 그다지 기꺼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기심이라 해도 상과없지만 읽는 내내 일본인들의 집요함과 끈기가 부러웠어요.
테라다 나오꼬의 '호텔 브랜드 이야기'를 읽을 때도 그러했지만, 호텔의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 이런 서적들을 우리나라에선 찾기 쉽지 않은 현실이 종내 아쉽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저력이 기분 나쁠 정도로 샘났어요. 최근엔 더욱 느낍니다만 우리나라 호텔 산업의 저변은 무지랭이 늙은 호텔리어의 눈에도 허술하기 짝이 없군요.
옮긴이 홍수영씨의 솜씨가 훌륭한 것인지 아니면 지은이 우라 가즈야의 원래 문체가 그러했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글은 꽤 간결하고 경쾌해 쉽게 읽힙니다. 표현력은 부러울 정도로 미려하군요. 본문에 나오는 호텔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읽으면 훨씬 흥미롭고 실감나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여행의 공간, 두번째 이야기도 나와 있던데, 당장 읽어볼 기회가 될런지 모르겠네요. 짬이 난다면 '디자인팔레트'를 다시 읽어 보고 싶습니다.
꿈의 호텔, 영국 게인즈버러 호텔
그나저나 제목을 읽으면서 의아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은밀한 기록'이라 표현했는데, 우라 가즈야는 방문하는 호텔들의 객실을 이곳 저곳, 가구까지 옮겨가며 줄자로 재고, 스케치를 하며 '은밀한' 벤치마킹을 행합니다. 더러는 카핏이나 커튼의 일부를 잘라 수집하기도 했는데 이런 행위는 어쩌면 호텔 측에 의해 제지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그 옛날 일본을 복제의 달인이라며 폄훼하기도 했습니다만 어차피 후발주자의 발전은 모방을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지요.
책의 맨 앞부분에 언급된 리츠칼튼 라구나 니구엘, 캘리포니아
국내 호텔 한 곳과 아주 유사하지요?
참고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지은이 우라 가즈야는 현재 닛켄스페이스디자인 Nikken Space Design의 대표로 계시군요. 닛켄스페이스디자인은 일본 최대의 전업 종합설계사무소 일건설계日建設計로부터 분리 독립된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라는데, 호텔 등의 디자인을 주로 합니다.
책을 소개해 주신 호텔아비아 최종인 기자님께 감사 말씀 전합니다.
여행의 공간, 어느 건축가의 은밀한 기록
무라 가즈야 지음
송수영 옮김
북노마드 출판
14,000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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